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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에 관한 리터러시가 필요한 이유① 이주민 이해, 왜 객관적 시각 갖기 어렵나?

차이와 차별에 대한 성찰이 다방면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이주민을 타자가 아닌 이웃으로, 우리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때에 따라 적절해야 한다.
이주민을 또 다른 문화적 존재로 살피자는 차이와 분별에 대한 성찰이 다문화 열풍을 불러왔듯이, 선주민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라는 보편성을 찾아 내는 일 또한 이 시대가 해야 할 일이다. 존중하자는 다문화가 의도치 않게 차별을 잉태하고 있다면 재고하는 게 당연하다.


언젠가 네팔 카투만두에서 한낮 땡볕을 피해서 나무 그늘 아래를 찾았을 때 있었던 일이다. 동네 어르신들은 다 모였는지 한 무리의 할아버지들이 머리에 혹은 모자 위에 저마다 꽃 한 송이씩 꽂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국에서야 머리에 꽂을 꽂고 다니면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 나오는 영혼이 자유로운 처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네팔에서는 할아버지들이 꽃으로 멋 내는 일이 일상인 듯 했다. 말주변 좋은 남자는 뭔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했고, 말수 적은 남자는 고개를 끄떡이다가 몇 번씩 손을 모으며 맞장구를 치는 모습은 한껏 여유로워 보였다. 고생이란 모르고 살아온 것처럼 능청떠는 남자들을 두고 통역을 맡은 이는 남자들이 매일 똑같이 하는 이야기인데도 키득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 어떠랴 싶었다.

평생 들녘에서 일하느라 검게 탄 얼굴들은 몇 개씩 빠진 치아와 쭈글쭈글한 주름에도 자잘하게 퍼지는 미소가 아름다웠다. 등 굽고 기력 다한 남자들에게 남은 즐거움이란 꽃 한 송이가 주는 위로와 벗들이 털어놓는 뻔한 이야기였다. 해 떨어져 돌아갈 집이 있고, 이야기 나눌 친구가 있고, 꽃 한 송이로 멋 낼 여유가 있다면 그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머리에 꽃을 꽂았다가는 제 정신인가 하는 눈총을 받을 수도 있는 한국인이 머리에 꽃을 꽂은 할아버지들에게서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그들과 이해관계가 없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다른 문화’를 좀 더 객관적으로 접근하여 그들의 여유로움을 살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할아버지들이 머리에 꽃을 꽂는 게 나에게 해가 된다면 느낌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주 문제는 객관성을 잃기 쉬운 주제다. 누구든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히기 쉬운 분야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결혼이주민과 이주노동자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이주민 문제는 좌로 가나 우로 가나 정답이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제 체류 외국인 250만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에서 이주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이야기, 내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이주에 관한 이해는 척박하여 호의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극단을 달리는 형국이다.

심지어 이주민에 대해 좀 더 호의적이라 하는 이들도 이주에 관한 이해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나름 좋은 의도를 갖고 한다는 방송들이지만, 접근 방식을 보면 인권감수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방송사들은 우리 안의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취지로 만든다면서도, 꼭 한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전제를 단다. 통역이나 자막을 활용해도 될 부분을 굳이 그렇게 고집한다. 그와 더불어 방송에서 다루는 용어들은 더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있다. ‘다문화학생’과 ‘한국학생’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국 국적을 갖는다. 간혹 이중국적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아이들을 방송에서 ‘한국학생’과 다른 존재인 것처럼 ‘다문화학생’이라고 못을 박는 순간, 그 학생에게는 ‘한국인’이 아니라는 낙인이 된다.

물론 이런 어이없는 표현은 행정관서와 교육 현장 문서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시민단체들도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가 흔하다. 부모를 따라 출생 후에 입국한 학생이면 모를까, 방송이 말하는 한국학생과 구분해야 할 다문화학생은 없다.

이처럼 이주에 관한 리터러시(이해교육, 문맹퇴치)가 필요한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주를 어떻게 볼 것인가, 다문화는 우리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앞으로 문화는 어떻게 될 것인가? 등을 미리 살펴서 사회갈등이라는 위기가 아니라 문화다양성이라는 기회를 잡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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